“구로사와 감독의 광팬이다. 좋아하는 작품이 너무 많은데, 매번 충격과 영감을 준 구로사와 감독에게 영화인의 한 사람으로 감사하다.”
봉준호 감독은 지난 2일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한 자리에 영상으로 축전을 보내 이렇게 말했다. 영감과 충격을 주는 선배 감독에게 표하는 예우와 존경의 마음이다.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영화산업과 문화 발전에 기여한 인물 또는 단체에게 주는 상이다. 올해는 일본 장르영화를 대표하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에게 돌아갔다. 지난해에는 홍콩 배우 저우룬파(주윤발)가 받았다.
3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문화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명예로운 상으로 굉장히 특별한 한 해가 되지 않을까 한다”며 “상을 받기 위해 개막식에 참가했는데 화려하고 훌륭한 자리는 처음이었다”고 감격했다.
1983년 영화 ‘간다천 음란전쟁’으로 데뷔한 구로사와 감독은 스릴러 장르의 ‘큐어'(1997년)를 통해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도쿄 소나타’는 2008년 제61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주목할만한시선 심사위원상을 받았고, 2020년 영화 ‘스파이의 아내’는 제77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주요 연출작 ‘회로’ ‘밝은 미래’ ‘절규’ 등 대부분이 공포와 스릴러다.
구로사와 감독은 “40년 이상 영화를 만들면서 베테랑이라는 말도 듣지만 여전히 영화를 찍고 나면 ‘다음에 어떤 영화를 찍지’ 고민할 정도로 테마나 스타일이 정해지지 않다”며 “스스로를 ‘나는 이상한 감독이야’라고 여긴다”고 자세를 낮췄다.
구로사와 감독의 다양한 영화들 가운데 특히 ‘큐어’는 봉준호 감독이 자주 언급하면서 “잊지 못할 작품”이라고 꼽고 있다. 영상 메시지로 수상 축하 인사를 보낸 봉 감독의 각별한 관심은 구로사와 감독을 기쁘게 했다.
“봉준호 감독과 몇 번 만났고 한국에 있는 나의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유명해지고 세계적인 거장이 되면서 손이 안 닿는 구름 위의 사람으로 여겼다”며 “어제 제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걸 보고 ‘아직 나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구나’ 싶었다”고 미소 지었다.
구로사와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을 통해 새 영화 ‘클라우드’와 ‘뱀의 길(2024)’ 두 편을 나란히 선보인다. “신작 두 편이 영화제에서 상영된 건 처음이라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고 반기면서 “전형적인 장르영화이자 B급영화들”이라고 소개했다.
“제가 올해 69세가 됐습니다. 1년에 두 편을 촬영하는 69세 감독을 떠올리면 딱히 없을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저는 좀 이상한, 다른 감독이 아닐까 생각해요.”
● ‘클라우드’와 ‘뱀의 길(2024)’은 어떤 작품?
‘뱀의 길(2024)’은 구로사와 감독이 1998년 연출한 동명 영화를 직접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프리랜서 기자가 잔혹하게 살해당한 딸의 복수에 나서면서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하는 이야기다. 구로사와 감독은 “5년 전 프랑스 프로덕션에서 다시 찍고 싶은 작품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그때 주저하지 않고 ‘뱀의 길’을 답하면서 이번 작품이 시작됐다”고 돌이켰다.
“각본을 ‘링’의 각본가로도 유명한 타카하시 히로시가 썼어요. 개성 있게 잘 썼는데, 제 작품이라기보다는 타카하시의 성향이 많이 들어갔죠. 많은 작품들 중에서 1998년 ‘뱀의 길’은 저의 작품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생각을 했나 봐요. 이번에 제 작품으로 바꿔야겠다는 욕망으로 셀프 리메이크를 했습니다.”
‘클라우드’는 온갖 물건을 헐값에 사들여 비싸게 파는 남성이 폭력의 대상이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일본을 대표하는 배우인 스다 마사키가 출연했다. 구로사와 감독은 “일상에서 폭력과 인연이 없는 이들이 죽고 죽이는 극한적인 관계의 액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투자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스다 마사키가 출연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그는 “스다는 일본 젊은 남자 배우들 중에서 연기력과 인기가 톱 수준이다. 이번 영화에서 멋있는 모습을 지우고 생활 속 피로를 표현해줬다”고 칭찬했다.
● 후배들에게 하고싶은 말? “장르영화도 찍어주길!”
일본 장르영화의 현실도 지적했다. 구로사와 감독은 “일본에 재능 있는 젊은 감독들이 많지만, 저처럼 장르영화를 목표로 하는 감독은 없는 것 같다. 그런 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장르영화의 매력을 묻는 질문에 미소를 띠며 “영화만으로 표현이 가능한 순간들이 아닐까 한다.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익사이팅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구로사와 감독은 하마구치 류스케, 후카다 코지, 미야케 쇼 등 현재 일본의 또 다른 세대를 형성하고 있는 후배 감독들을 “제가 상상하지 못하는, 제 손에 닿지 않는 영화를 찍는다”고 높게 평한 뒤 “그 감독들이 지금 가고 있는 길을 다른 사람보다 먼저 계속 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끔은 장르영화도 찍어보지’라고 말하고 싶다”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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