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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포테이토 지수 80%] ‘말할 수 없는 비밀’, 정공법으로 연주한 원작의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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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수(왼쪽)와 원진아가 주연한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한 장면. 사진제공=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2007년 대만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을 꼽자면 대부분 두 대의 피아노에 각각 연주자가 앉아 선율을 주고받는 피아노 배틀을 떠올릴 테다. 단순히 행위 자체보다는 사회자의 진행, 군중의 환호 뒤에 두 연주자는 숨을 죽이고 건반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그 리듬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한껏 몸을 낮춰 천천히 음을 쌓고, 양손을 거세게 몰아치는 연주자 몸의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지기도 한다. 

표준 88개 내외의 검정과 흰건반 안에서 다양한 음역대의 소리가 표현되고, 누르는 강도에 따라 세기가 달라지는 피아노의 특성을 극대화한 장면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사랑이란 감정을 한 음절씩 쌓아올린다. 언어와 문화를 넘어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쌓은 고등학생들의 풋풋한 감정의 웅크림과 기지개에 반응한 이유다. 

대만 영화를 리메이크한 서유민 감독의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원작을 구성하는 기본 멜로디는 그대로 두고, 새로운 음을 덧붙이는 편곡 작업을 거쳤다. 시대적 배경과 정서를 리메이크라는 틀에 맞춰서 조금씩 변주한다. 원작을 오마주한 장면, 묘하게 비틀어 재해석한 장면, 설정을 덧대어 추가된 장면으로 원작 팬들에게는 기존의 대만영화와 한국판을 비교해 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LP숍에서 들국화의 ‘매일 그대와’를 듣는 정아(왼쪽)와 유준의 모습. 사진제공=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 로맨스를 표현하는 방식

독일 유학 중이던 피아니스트 유준(도경수)은 쇼팽 콩쿠르 대회에서 몸이 심하게 떨리는 통증으로 인해 피아노를 치지 못하자 5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다. 대학교 캠퍼스를 둘러보던 유준은 이번 학기를 마치면 철거된다는 음대 연습실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에 이끌리고, 그곳에서 정아(원진아)를 만난다. 첫 만남부터 정아에게 자꾸만 시선이 가지만 그녀는 어딘가 이상하다. 수업은 늘 빠지고, 갑자기 나타났다가 또 사라진다. 유준과 정아의 만남은 건반의 끝에서 또다른 끝으로 향하듯이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2000년대 초반 한국 멜로영화들이 지닌 고유한 정서가 이번 ‘말할 수 없는 비밀’에 진하게 배어있다. 마음 한쪽이 말랑말랑하고, 어쩐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온몸이 배배 꼬인듯한 기분이 들던 그때의 감성을 떠올리게 한다. 휴대폰이 없어서 약속 시간에 맞춰 상대를 기다리고, 타이밍이 어긋나면 그날은 허탕이다. ‘접속’ ‘동감’ ‘시월애’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답신을 받지 못하더라도 마음을 전하는 인물들의 꼿꼿함도 감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물론 대만 청춘 로맨스와 2000년대 한국 로맨스가 전반적으로 비슷한 감성을 공유하는 탓도 있지만 한국판 ‘말할 수 없는 비밀’만의 특색처럼 보이기도 한다. 2019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두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대학교 캠퍼스를 누비고, LP숍에서 1985년 발매된 들국화의 1집 7번 트랙 ‘매일 그대와’를 헤드폰으로 듣는다.  

당연하게도 유준은 휴대폰 번호를 물어보며 만남을 이어가려고 하지만, 정아는 그런 것은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고 말한다. 연락 수단에 한계가 있던 1990~2000년대의 상황이 이들 사이에서 재현된다. 문자메시지나 전화가 불가능한 탓에 유준은 늘 강의실을 둘러보고, 정아를 처음 만났던 연습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시선이 닿는 곳에 머물지 않는 정아로 인해 유준은 초조하고 불안하다. 기록되어 흔적으로 남거나, 연결이 불가능한 이들의 관계는 언젠가 끊어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함이 있다. 서유민 감독은 “좋은 이야기를 한국에 맞게 다시 만들어서 관객들께 재미와 감동 드리고 싶었다”며 “욕심 내서 도전하게 됐다”고 밝혔다.  

2007년 개봉한 대만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주인공 저우제룬(왼쪽)와 구이룬메이. 사진제공=엔케이컨텐츠 

이들의 로맨스는 ‘타임리프'(과거 또는 미래로의 시간 여행)라는 특수한 설정으로 자꾸만 어긋나거나 멀어진다. 원작과 리메이크작을 관통하는 주요한 설정이다. 1999년 예술고등학교 배경의 원작에서 전학 온 피아노 전공생인 상륜(저우제룬)은 졸업식날 철거된다는 건물의 연습실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샤오위(구이룬메이)를 만난다. 한국판에서처럼 샤오위는 늘 어디론가 사라지고, 수업도 ‘땡땡이’를 친다. 

영화의 반전은 샤오위는 샹륜과 20년의 시간적 격차가 벌어진 1979년에서 온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샤오위는 연습실의 오래된 피아노 안에서 ‘시크릿'(Secret) 악보를 발견하고 ‘음표를 따라 여행을 떠나시오. 처음 본 사람이 당신의 운명이리니. 여행을 마치고 나면, 빠른 건반을 타고 돌아와야 하리라’라는 글귀 그대로 실행했다가 샹륜을 만나게 됐다. 한국판 ‘말할 수 없는 비밀’도 비슷한 설정이지만 정아가 머물던 과거가 1999년으로 그려지면서 2000년대 초반의 멜로 드라마의 정서를 품는다. 

영화에서 반복해 언급되는 19세기 폴란드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쇼팽과 그의 연인 조르주 상드의 관계는 유준과 정아를 표상한다. 6연상이던 조르주 상드는 마리아 보진스키에게 청혼을 하고 답변을 기다리던 쇼팽에게 열혈히 구애하며, 약 1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연인 사이로 지냈다. 결핵에 걸린 쇼팽이 조르주에 대한 걱정을 담아 작곡한 ‘빗방울의 전주곡’을 비롯해 많은 음악들에는 흔적이 묻어있다.

쇼팽이 연인과 함께 한 순간을 곡으로 남겨 영원으로 간직했듯 극 중에서 줄기차게 말하는 “이 순간을 간직한다”는 대사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주제를 정공법으로 경유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한국판에서는 원작이 품고 있던 오묘한 분위기가 다소 흐릿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지닌 아련함과 애틋함만이 지닌 무게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서로에게 설렘을 느끼는 정아(원진아)와 유준(도경수). 사진제공=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 도경수·원진아의 색깔 

도경수는 사랑에 빠진 남학생의 몽글몽글함과 자꾸만 어긋나며 생긴 실망과 그리움의 강도를 높낮이 있게 표현했다. 그들이 처음 만난 연습실에 놓인 오래된 피아노 의자에 서로 걸터앉아 유준과 정아가 ‘고양이의 춤’을 함께 연주하는 장면은 서로의 눈 맞춤과 싱그러운 미소가 인상적이다. 정아는 유준에게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에 쳤던 곡에 대해 묻고, 두 사람은 각자의 추억을 공유하듯 건반 위에 손을 나란히 올려두고 감정을 교감한다.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의 공연을 보러 가기로 약속해 기다렸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은 정아로 인해 절망한 유준의 비에 젖은 얼굴도 그렇다. 비가 내림에도 같은 자리에서 망부석처럼 기다리는 웅크린 몸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저우제룬이 진중하면서 아련한 느낌이라면, 도경수는 단호하면서 애절한 느낌이다. 두 배우 모두, 단정한 외모에 소년미가 묻어나지만 각자의 분위기로 감정을 단단하게 쌓았다. 

원진아는 원작의 샤오위의 반듯한 이미지를 똑 닮았다. 고등학교 배경인 대만판과 달리 대학교를 배경으로 교복을 입진 않지만 어깨 위의 단발, 가지런한 치마와 니트를 입은 캐릭터의 외형적인 묘사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정아는 눈을 감고 연습실에서 강의실까지 걸음수를 세거나, 공허하게 어딘가를 바라보며 눈물을 삼키고 종종 이상한 말을 하는데, 원진아는 후반부에 드러나는 비밀과 초반부에 흩어진 감정들이 접합할 수 있도록 세밀히 세공한다.

차분한 느낌이었던 구이룬메이와 달리 원진아는 맑고 해사함이 강하다. 슬픔을 지녔지만 색깔이 조금 다른데, 천식으로 다소 수척했던 원작의 설정이 사라지면서 분위기도 달라졌다. 원진아는 사랑에 빠진 소녀의 설렘과 비애의 정서를 농도 깊게 묘사한다. 

두 사람의 사랑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관계도 돋보인다. 유준을 짝사랑하는 인희는 신예은, 유준의 아버지는 배성우가 연기한다. 

인희는 자꾸만 시선이 마주치는 유준으로 인해 자신을 좋아한다고 오해하는 인물로, 거침없는 면이 매력적인 캐릭터다. 원작에서 수줍어하던 면모와 달리 당돌한 구석이 있는데 신예은은 특유의 밝은 눈빛과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미소로 시선을 끈다. 부자 지간의 호흡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재미 요소 중 하나다. 대학 교수인 유준의 아버지는 집 밖에서 권위적인 모습과 상반된 장난기 가득하고 유머러스하다. 배성우는 특기를 발휘해 극의 재미를 살린다. 

원작인 대만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한 장면. 사진제공=엔케이컨텐츠 

● 알고 보면 더 재밌는 몇 가지 요소들

캐릭터의 고유한 특성과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거나, 조금씩 변형한 몇몇 장면은 미리 정보를 챙겨 본다면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원작의 하이라이트인 피아노 배틀 장면은 쇼팽의 ‘흑건'(에튀드 Op. 10, No 5)과 ‘왈츠'(Op.64, No. 2)를 편곡해서 연주했다. 이번 리메이크에서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솔로로 바뀌었다. 하지만 구도나 장면 구성은 비슷하다. 카메라가 건반 사이를 넘나들고 빠져나오는 실험적인 촬영 방식이 생략된 점은 아쉽지만, 리메이크 과정에서 제작진들이 고심한 부분이 느껴진다. 

타임리프를 통해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온 샤오위는 연습실에서 쳤던 피아노곡 ‘시크릿’을 샹륜에게 알려주면서 “집에 가기 전엔 늘 이렇게 빨리 쳐”, “옛날 피아노실에서는 이 곡을 치면 안 돼”라고 당부한다. 이런 대사는 한국판에서도 그대로 등장해 반가움을 안긴다. 

또한 샤오위의 정체를 알게 된 샹륜이 책상에 엎드려있다가 실시간으로 글자가 적히는 것을 보는 장면도 이어진다. 책상이 아닌 창문의 난간 부분으로 공간이 바뀌어 색다른 분위기를 낸다. 

감독: 서유민 / 출연 : 도경수, 원진아, 신예은 외 / 배급 :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 개봉일: 1월28일/ 관람등급: 전체 관람가/ 러닝타임: 103분

[맥스무비 리뷰는 ‘포테이토 지수’로 이뤄집니다. 나만 보기 아까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반짝반짝 잘 익은 BEST potato(100~80%), 탁월하지 않아도 무난한 작품은 NORMAL potato(79~50%), 아쉬운 작품은 WORST potato(49~1%)로 나눠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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