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그룹 부흥기
1980년대 재계 6위
IMF 부채로 그룹 몰락
지난해 쌍용그룹의 전성기를 이끈 김석원 회장이 별세하면서 다시 한번 쌍용그룹에 대한 관심이 주목된 바 있다. 쌍용그룹은 비누 하나로 사업을 시작해 한때 재계 서열 5위에 오르기도 한 대한민국의 대기업이었다. 그러나 현재 쌍용그룹은 해체되어 이제는 쌍용 대신 다른 사명을 달고 주요 기업체들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쌍용 그룹의 몰락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쌍용그룹은 우리나라의 정치인으로도 잘 알려진 고 김성곤 회장이 설립했다. 김성곤 회장은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39년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를 설립하며 사업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김성곤 회장은 해방 직후인 1948년에 고려화재해상보험과 금성방직을 설립했으며 이후 동양통신을 창간하고 연합신문을 인수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이 당시 설립된 고려화재해상보험은 현 흥국화재로 자리 잡았다.
김성곤 회장이 후학 양성에 관심이 많았던 탓에 1959년 국민대학을 인수했으며, 여러 사업을 운영하기 시작하며 쌍용그룹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쌍용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쓰인 것은 1962년 쌍용양회를 설립한 것이 시초로 보인다. 쌍용이란 이름의 뜻에 대해 추측되기도 했는데, 이는 쌍용양회의 영월 공장이 영월군 서구 쌍용리에 있었기 때문으로 확인됐다.
쌍용양회의 경우 국내 첫 레미콘 사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건설 붐과 함께 급성장한 기업으로 꼽힌다. 쌍용양회의 대성공 이후 김성곤 회장 산하의 회사를 그룹으로 묶어 사명 또한 쌍용으로 변경하기 시작하면서 쌍용그룹 체재가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쌍용그룹의 성장은 김성곤 회장의 정치 이력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예전 정·재계의 경우 정경유착이 비일비재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여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있던 김성곤 회장의 위력은 대단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광복 직후 김성곤 회장은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1958년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자유당 소속으로 제4대 민의원으로 당선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4·19혁명이 일어나면서 잠시 정계를 떠났으나 5.16 군사쿠데타와 함께 정치계에 복귀했다고 전해졌다.
김성곤 회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 형인 박상희 씨와 어린 시절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자, 김성곤 회장 역시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핵심 정치인으로 활약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 당시 김성곤 회장은 민주공화당의 재정위원장을 맡아 정계와 재계 사이 가교역할을 수행하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10.2 항명 파동 후 김성곤 회장은 정치계를 떠나야 했다.
당시 김성곤 회장과 일부 여당 의원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상의 없이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안을 국회에서 가결 시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 밖에 났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정계에서 퇴출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야망가였던 김성곤 회장은 정계에서 퇴출당한 것이 억울한 듯 폭음을 일삼아 건강이 빠르게 나빠지며 지난 1976년 별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쌍용그룹 김성곤 회장의 후계는 장남인 김석원 회장이 맡았다. 김석원 회장으로 경우 만 29세의 젊은 나이에 회장직에 올라 여러 신사업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쌍용그룹의 중흥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김석원 회장은 사업을 빠르게 확장해 기업의 성장성을 증명했다.
현재 STX의 전신인 쌍용중공업과 쌍용 종합건설을 수립했으며 석유 사업에도 뛰어든 바 있다. 또한, 현재 신한금융투자의 전신인 효성 증권과 동아 자동차를 인수했다. 동아자동차의 경우 당시 삼성과의 경쟁에서 이기며 얻어낸 결과물이라 재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쌍용그룹의 입지가 단단해지면서 쌍용그룹의 총매출은 1996년 당시 25조 원에 달하며 재계 서열 5~6위를 차지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쌍용그룹 역시 IMF의 파도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쌍용그룹이 보유한 회사들이 과도한 부채를 가진 사실이 알려지며 김석원 회장의 문어발식 경영에 대한 지적도 그치지 않았다.
당시 김석원 회장이 가장 애착하던 회사인 쌍용자동차가 지속적인 부진을 기록하며 그룹의 붕괴를 만든 시초가 된 것이다. 인수한 동아자동차의 사명을 쌍용자동차로 변경하고 코란도, 팬더 칼리스타, 체어맨 등을 출시한 바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된 점은 김석원 회장이 쌍용자동차의 사업을 벌여놓고 회장직을 동생인 김석준 회장에게 넘긴 것이다. 절대로 정계에 발을 들이지 말라는 김성곤 회장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정계에 들어가기 위해 이런 결단을 내린 것이다.
결국 쌍용그룹의 김석원 회장은 1996년 대구광역시 달성군 선거구의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다. 그러나 검찰청이 전두환의 은닉 재산을 추적하는 가운데 쌍용양회의 지하창고에서 사과박스 25개에 담긴 비자금이 발견되자 의혹의 중심에 서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결국 철저한 진상조사 없이 정권의 외압에 의해 의혹을 남긴 채 수사가 종료됐다. 김석원 회장이 정치계의 사건에 휘말린 사이 쌍용 그룹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뒤늦게 그룹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김석원 회장이 국회의원 사퇴를 선언하고 쌍용그룹으로 복귀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정치판에서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던 사이 쌍용자동차의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으며 1997년 쌍용자동차가 가진 부채가 다른 쌍용 계열사의 흑자 수준을 넘게 되면서 그룹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됐다. 한편, 쌍용그룹은 지난 2000년에 해체되어 현재 24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쌍용그룹의 정유 사업은 S 오일로 사명을 변경해 운영 중이며 ‘쌍용’ 역시 현재 사명을 GS글로벌로 변경해 각자의 분야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쌍용그룹 몰락의 원인은 회사 자체의 문제가 아닌 경영진들의 판단미스 즉, 정치를 위했던 그들의 선택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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