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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포테이토 지수 85%] 옐로·레드·그린으로 맞이하는 죽음 ‘룸 넥스트 도어’

맥스EN 조회수  

죽음을 다룬 영화는 침울한 분위기 대신 원색을 활용한 소품과 의상 등을 활용해 생의 에너지를 표현한다. 극 중 마사(오른쪽)가 자신의 집 쇼파에서 잉그리드와 대화하는 모습. 사진제공=워너브라더스코리아  

아픈 몸과 정신이 더는 버틸 수 없을 때, 온전히 나답게 살 수 없는 순간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어디까지 인간다운 존엄성을 지킬 수 있을까. 작가인 잉그리드는 오래전 가깝게 지낸 친구 마사가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한 아름 꽃다발을 들고 병원을 찾아온 잉그리드를 앞에 두고 마사는 자신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한다. 어릴 때 낳은 딸은 아버지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는다면서 자신을 원망하고 있고, 종군 기자로 전쟁터를 누비면서 만난 여러 인물들에 대한 단평도 풀어낸다. 

희망을 품고 새로운 치료를 시작한 마사는 다른 곳으로 암세포가 전이됐다는 판정에 절망하지만, 곧 이런 순간이 올 줄 알았다는 듯 잉그리드에게 안락사를 돕는 약을 일찌감치 준비해뒀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눈을 감는 날 옆방에 잠시만 머물러 달라고 부탁한다. 성공한 작가로 새 작품을 집필 중인 잉그리드는 오랜 고민 없이 마사의 부탁을 받아들인다. 그리곤 둘은 뉴욕 외곽의 숲속 고급 주택을 한달간 빌려 함께 지내기 시작한다.

둘의 일상은 특별할 게 없다. 가볍게 식사하고 함께 영화를 보거나 차를 마실 뿐이다. 잉그리드는 운동할 곳을 찾아 운동을 하고, 멀리서 찾아온 친구와 만나 다정한 식사도 한다.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두 친구가 가닿는 곳에는 죽음이 있다. 영화 ‘룸 넥스트 도어’은 온전히 ‘죽음’에 관한 영화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앞둔 마사와 그를 지켜보는 잉그리드가 보내는 조용하고 고즈넉한 시간들을 통해 곧 다가올 마사의 죽음 그리고 훗날 잉그리드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닥칠 죽음의 순간에 관한 이야기다.

다만 영화가 다루는 죽음은 잿빛이 아니다. 뉴욕의 고급 아파트인 마사의 집안 곳곳에 놓인 화려한 소품들, 마사와 잉그리드가 즐겨 입는 옷과 스카프, 가방 그리고 이들이 함께 머무는 고급 주택의 햇살 쏟아지는 선베드까지 원색의 강렬함을 지녔다. 죽음을 앞둔 마사가 차려입는 샛노란 재킷과 붉은 립스틱, 친구의 죽음이 두렵지만 입 밖에 속내를 꺼내지 않는 잉그리드가 입는 화사한 그린 코트와 붉은 스웨터처럼 시종일관 원색의 컬러로 스크린을 채운다. “침울한 분위기 대신 빛과 생명력이 충만한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는 감독의 의도가 곳곳에 베어 있다. 

● 죽음의 곁에 있는 “인간적인 이해심”

마사는 뉴욕타임스의 종군기자로 여러 전쟁터를 누볐다. 꽉 찬 생의 에너지로 글을 써 온 그는 독한 약물 치료로 예전처럼 생각하지 못하는 순간이 다가오면서 두려움을 느낀다. 더는 나답게 살 수 없을 때, 마사가 택한 건 안락사다. 엄연한 범죄. 마사의 결심에 친구들은 ‘옆방에 있어 달라’는 그의 부탁을 거절한다. 그 부탁을 받아준 유일한 사람, 잉그리드는 젊은 시절 함께 일한 인연 외에 오랫동안 마사와 연락도 하지 않고 지냈지만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영화에서 잉그리드는 “지금은 이야기할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누군가 마사의 상황을 물을 때도,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물어볼 때도 마찬가지다. 존엄을 지키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무리하려는 마사에 비해 잉그리드는 왜 마사의 부탁을 들어주는지, 그의 진짜 마음은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구구절절 속내를 꺼내지 않을 때 그 사람의 진심은 더 깊이 와 닿는다. 감독은 잉그리드를 통해 “누군가 죽음을 준비할 때 인간적인 이해심으로 그 곁에 있어주는 일이 우리가 타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이라는 사실을 역설한다. 그렇게 영화는 ‘죽음’을 넘어 또 다른 이들에게 계속 이어지는 ‘생’에 관한 이야기로 나아간다. 

선베드에 누워 있는 마사(왼쪽)와 잉그리드의 모습. 감독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일광욕 하는 사람들’에서 영감을 받아 이 장면을 완성했다. 사진제공=워너브라더스코리아 

페르도 알모도바르 감독은 ‘그녀에게’ ‘내가 사는 피부’ ‘페인 앤 글로리’ 등 영화를 통해 스페인을 대표하는 연출자로 인정받고 있다. 스페인의 거장 감독으로도 불린다. 70대 중반인 그는 이번 ‘룸 넥스트 도어’에서 죽음을 주제로, 어떻게 살고 또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묻는다. 올해 열린 제81회 베니스 국제영화제는 최고의 자리인 황금사자상을 이 작품에 수여하면서 감독의 질문에 답했다. 

말기 암, 시한부, 안락사까지 삶에서 마주하고 싶지 않고 답을 내리기도 어려운 주제를 다루지만 영화는 결코 무겁지 않다. 마사와 잉그리드는 따뜻한 차와 과일을 나눠 마시면서 함께 보낸 1980년대 뉴욕의 청춘을 추억하고, 뜨거웠던 연애를 웃으며 돌이킨다. 앞으로 다가올 죽음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이야기할 뿐이다. 곧 다가올 비극은 잊은 듯, 특별한 사건이나 갈등 없이 평온한 일상을 쌓아가면서 죽음으로 다가간다.

마사 역의 틸다 스윈튼과 잉그리드를 연기한 줄리앤 무어가 아니었다면 ‘룸 넥스트 도어’는 전혀 다른 작품이 됐을지 모른다. 감독이 왜 이들 두 배우와 손잡았는지, 올해 베니스 국제영화제가 왜 이 영화를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했는지 명배우들이 명연기로 증명한다. 틸다 스윈튼은 세계적인 거장 감독들과 두루 작업하면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필모그래피를 쌓았고, 이번 ‘룸 넥스트 도어’로 죽음을 앞둔 인물의 심연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의 금빛 머리카락까지도 마치 연기를 하는 듯 하다.

줄리앤 무어는 새롭다. 블록버스터와 예술 영화를 넘나드는 그는 죽음을 선택한 친구의 곁에서 굳이 묻지 않고, 굳이 말리지 않으면서 묵묵한 이해의 마음을 보낸다. 마사가 떠나고 찾아온 그의 딸과 마주한 잉그리드이 겪는 감정의 파고가 순식간에 스크린 넘어 관객에게도 다가온다. 마사의 딸이 등장한 순간, 그를 바라보는 잉그리드의 얼굴을 통해 영화는 비로소 죽음을 넘은 생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룸 넥스트 도어’ 촬영 현장에서 줄리앤 무어와 페르도 알모도바르 감독, 틸다 스윈튼(왼쪽부터)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 사진제공=워너브라더스코리아 

감독 : 페르도 알모도바르 / 주연 : 틸다 스윈턴, 줄리앤 무어 / 제작 : 로드픽쳐스 / 장르 : 드라마 / 개봉 : 10월23일 /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 107분

[맥스무비 리뷰는 ‘포테이토 지수’로 이뤄집니다. 나만 보기 아까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반짝반짝 잘 익은 BEST potato(100~80%), 탁월하지 않아도 무난한 작품은 NORMAL potato(79~50%), 아쉬운 작품은 WORST potato(49~1%)로 나눠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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