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니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동네 제천.
제천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산세와 계곡이 좋은 탓도 있지만 서울에서 2시간 이내 거리에 위치하면서 강원도, 경상북도 등지의 산세 좋은 지역과 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충청도 여행지 중 제천을 종종 찾게 됩니다.
제천 여행을 갈 때면 북으로 치악산 국립공원 동남으로 소백산 국립공원 남쪽으로 월악산 국립공원이 호위하는 듯해 무척이나 편안함을 느끼는 곳이기도 하며, 이 글에서는 제천 여행 장소 중 청풍문화재단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청풍문화재단지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청풍호로 2048 청풍문화재단지
이곳 주차장은 과하게 넓어 기운 빠지는 듯한 느낌도 드는 곳.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제천 청풍 팔영루(堤川 淸風 八詠樓)는 옛 청풍부를 드나드는 성문 위에 지은 건물로 조선 숙종 28년인 1702년에 청풍부사 이기홍이 건립을 추진하며 이름을 남덕문이라 불렀다.
이후 고종 7년인 1870년에 부사 이직현이 금남루와 함께 다시 지었고 부사 민치상이 청풍팔경을 즐기기 위해 여덟 수의 팔영시를 지은 뒤 팔영루라 불렀다. 원래의 위치는 이곳이 아니었으나 충주댐을 만들면서 수몰될 상황이기에 1983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팔영루는 지나 살짝 오르막길.
둥근 돌판 위에 그보다 작은 돌을 옆으로 세워 마소가 끌어 돌리면서 곡식을 찧거나 빻는 연자방아와 전통가옥.
이 가옥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제천 도화리 고가이며 충주댐을 만들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일반적으로 동쪽 방 2칸은 방과 방 사이에 장지문을 두어 문을 개방하면 하나의 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제천 도화리 고가는 방과 방 사이에 벽을 세우고 문을 달았다. 이러한 형식은 오래된 집에서만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제천 도화리 고가를 지나며 수몰 역사관이란 푯말을 본다.
이 가옥은 제천 황석리 고가로 이 역시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다른 가옥들과 마찬가지로 충주댐을 만들며 이곳으로 옮겨진 이 옛집은 규모가 크진 않지만 조선 시대의 양반집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그리고 그 옆으로 돌아 청풍호 방향으로 걸어가면 넓은 기와지붕이 보인다.
청풍호를 배경으로 한 기와지붕 건물이 바로 수몰 역사관.
이 수몰 역사관은 2003년도에 준공한 건물로 충주댐 건설로 제천시 5개면 61개리 3,301 가구가 수몰됨에 따라 그 역사를 잊지 않도록 건립 후 여러 정보를 모아 놓은 곳이다.
이곳은 청풍문화재단지 내에서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공간.
의자에 앉아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청풍호를 바라보는 느낌이 무척이나 풍요로운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충청도 여행지를 선택함에 있어 제천 여행이 그 목적지가 된다면 동선에 문제가 없는 한 이곳을 들러 잠시라도 앉아있다 가게 된다.
곳곳으로 거닐다 보면 쉴 만한 공간이 보인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창공의 푸르름과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충청도 여행지 청풍문화재단지의 어우러짐.
이른 아침에 방문하면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충청도 여행지에서 만난 예스러운 풍경과 더불어 아늑한 분위기.
그러면서도 일관된 흐름을 보여주는 동선배치가 돋보이는 제천 여행 추천 장소라 하겠다.
호랑이와 대치 중인 저분의 이름이 ‘김중명’이라고 한다.
조선 문신인 홍직필의 유고집에 의하면 청풍 김씨 김중명은 인조 을유년에 무과에 도전 급제한 뒤 성묘를 갔던 길에 묘 뒤에 숨어 있던 호랑이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 동행한 사람들은 혼비백산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김중명이 말에서 내려 고함을 크게 지르며 호랑이에게 다가가 바로 차서 호랑이를 죽였다고 한다.
이에 효종이 그를 중히 여겨 병마절도사 벼슬에까지 이르렀으나 자신을 알아주던 효종이 승하하자 중명은 고향인 제천으로 내려와 생을 마쳤다고 한다.
이곳의 석물군은 수몰 이전 옛 청풍, 수산, 덕산, 한수 지역에 산재되어온 고대 사회의 장의 풍속 무덤인 지석묘 5점 문인석 6점 도호부시대 군수와 부사의 송덕비, 공덕비, 선정비 32점, 관찰사, 현감, 군수의 치적비 공적비 10점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석물군을 뒤로하고 조금 더 전진하면 누각이 보인다.
첫 번째 누각인 제천 청풍 한벽루(堤川 淸風 寒碧樓)는 청풍 관아에 딸린 건물로 고려 충숙왕 4년인 1317년에 청풍현 출신 승려 청공이 왕의 스승인 왕사가 되면서 청풍현이 청풍군으로 승격된 것을 기념하고자 세운 누각이다.
현재 보물 제528호로 지정되어 있고 밀양 영남루(보물 제147호), 남원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함께 조선 시대 누각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꼽힌다.
1972년 8월 대홍수로 건물이 무너지고 현판들도 모두 떠내려가게 되어 1975년에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고 이후 충주댐이 만들어지며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이번 제천 여행에서는 모두 수몰의 위기를 벗어난 문화유산들이란 공통점이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제90호인 제천 청풍 응청각(堤川 淸風 凝淸閣)은 조선 시대 관아 건물 중 하나로 손님이 머물던 곳이며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명종 초 이황이 단양 군수로 있을 때 ‘응청각’이란 이름을 지었고 인조 15년인 1637년에 충청감사 정세규가 응청각에 묵었다는 일기가 남아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제34호인 제천 청풍 금병헌(堤川 淸風 錦屛軒)은 조선 숙종 7년인 1681년에 청풍부사 오도일이 지은 관청으로 집회 및 집무를 처리하던 관아의 중심 건물이다. 본래의 이름은 명월정이었으나 영조 2년인 1726년에 청풍부사 박필문이 다시 지으면서 금병헌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금풍헌 관람까지 마치고 관수정 방향으로 향한다.
저 위에 우뚝한 팔각정이 관수정.
그리 높지 않으면서도 청풍호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오늘의 충청도 여행지 최고 뷰를 선사하는 곳이 아닐까 싶다.
관수정을 지나 이번엔 연리지(連理枝) 앞이다.
체천여행을 하며 처음으로 만난 연리지란 생각.
뿌리가 서로 다른 나무가 자라면서 가지가 붙어 하나의 나무처럼 보이는 것을 연리지라 부른다.
희귀한 현상으로 남녀 사이 혹은 부부 사이에 사랑이 가득한 경우를 들어 연리지 같다고도 하며 효성이 지극한 자식과 부모를 비유해 부르기도 한다. 종종 나뭇가지가 아닌 줄기가 엉켜 하나의 나무처럼 자라는 경우도 보이는데 이런 경우엔 연리지라 하지 않고 연리목(連理木)이라 부른다. 또 서로 다른 나무의 뿌리가 엉켜 하나의 나무처럼 자라는 것을 연리근(連理根)이라고도 하는데 뿌리가 붙어 자라는 것은 그 구분이 모호해 그다지 유명한 형태는 아니다.
연리지를 지나 오르막길을 조금 오르다 보면 돌계단이 보인다. 이 계단 양쪽으로 석성이 보이는데 이 성을 망월산성이라 부른다. 아마도 이 언덕 정상을 망월산이라 부르는가 보다.
이곳 망월산성은 복원된 것이며 이곳의 명칭은 청풍망월산성지(淸風望月山城地)라 하는 것이 명확할 것이다.
청풍말원산성지는 1994년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그 산성지에 세워진 망월산성은 해발 336m의 망월산(望月山)에서 북쪽으로 뻗은 해발 237.2m의 봉우리 정상과 서쪽의 경사면을 에워싼 둘레 약 500m의 석축산성이다.
석축산성 위에서 내려다보는 청풍호와 청풍대교가 멋지다.
망월산성에서 바라본 청풍문화재단지 전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망월루.
가장 높은 곳이긴 하지만 아래쪽 관수정이 뷰는 더 멋져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주변의 산 그리메를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건너편으로 작성산, 동산, 작은동산, 중봉, 용바위봉 등의 금수산을 이루는 산어깨가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되돌아 나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호인 제천 청풍 금남루(堤川 淸風 錦南樓))를 만난다.
조선 순조 25년인 1825년에 청풍부사 조길원이 세원 관청의 정문으로 고종 7년인 1870년에 부사 이직현이 고쳐지었다. 이후 금남루는 청풍면 읍리의 청풍초등학교 교문으로 사용되다가 충주댐을 만들면서 옮겼다.
보물 제546호인 제천 물태리 석조여래입상(堤川 勿台里 石造如來立像)
기다란 기둥 모양의 불상인 제천 물태리 석조여래입상은 통일 신라 말기 불상과 비슷한 당당한 어깨와 목의 형식화된 주름, 사실적이지 않은 손 등에서 고려 초인 10세기 무렵 작품 특징이 드러난다.
그렇게 청풍문화재단지를 휘휘 둘러보고 다시 팔영루.
오늘… 하늘이 맑고 구름이 예쁘다.
충청도 여행지 제천 여행 영상 2분 1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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